이봉명 시집 『가풀막』발간

꿀벌에 대한 명상> <아주 오래된 내 마음속의 깨벌레> <지상의 빈 의자> <포내리 겨울> <지상을 날아가는 소리> <바람의 뿌리> 산문집 <겨울엽서> 등

이영노 | 기사입력 2020/10/28 [10:59]

이봉명 시집 『가풀막』발간

꿀벌에 대한 명상> <아주 오래된 내 마음속의 깨벌레> <지상의 빈 의자> <포내리 겨울> <지상을 날아가는 소리> <바람의 뿌리> 산문집 <겨울엽서> 등

이영노 | 입력 : 2020/10/28 [10:59]

이봉명 작가의 부풀막 시집표지  © 이영노

 

[오늘뉴스=이영노 기자] 산촌 무주에 이봉명 작가가 시집을 발간했다.

 

시집은 지난 10월 20일 발행한 ‘가풀막’ 시집은 도서출판사 두엄이고 후원은 문화체육관부.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이다.

 

2020 국고장애인문화예술향수 지원사업인 시집발간은 정치계 등 한국문인들의 큰 관심사로 조명받고 있다.

 

작가 이봉명  © 이영노

 

이번에 제27집을 발간한 이봉명 작가는1956년 전북 무주에서 출생으로 1991년 <詩와意識>으로 등단. 무주작가회의, 전북작가회의, 한국작가회의, 한국장애인문인협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시집 <꿀벌에 대한 명상> <아주 오래된 내 마음속의 깨벌레> <지상의 빈 의자> <포내리 겨울> <지상을 날아가는 소리> <바람의 뿌리> 산문집 <겨울엽서>가 있다.

 

현재 무주작가회의를 창립하여 문학의 불모지 무주에 문학의 활성화를 이룩하고, 지금 27년 된 <무주문학> 발간은 앞으로도 지역 학교에서 문학강연회 및 시화전을 통하여 문학인 육성에 앞장을 설 것으로 예측된다.

 

이 작가는 계속하여 시화전과 문학강연을 통해 지역문학의 저변을 넓혀갈 계획. 전북작가회의 이사, 한국작가회의 무주지부장, 눌인김환태문학제전위 사무국장. 눌인문학회 사무국장.33회의 문학강연회를 관내 중.고등학교에서 실시하고 있다.

 

또, 시화전도 47회 실시하여 지역 문학활동 뿐 아니라 백일장 등을 통하여 문학을 하고자 하는 지망생들을 통해 많은 토론과 현장학습도 실시 중이다.

 

한편, 무주문학 제27집 발간 공동시집 3권 발행. 문예지 및 동인지 3권 발행.(눌인문학, 반딧불문화) 등은전북 무주군 적상면 상중리길 38 (포내리886-1), 전 화 : (063) 324-1558. 손전화 : 010-4453-2528.

 

서평씨방에 간직된 천진무구함의 詩學은 이병초(시인 웅지세무대 교수)의 시에 닿는 인간적 체취를 담아본다.

 

적상산 자락에 차려진 시의 밥상이 걸다. 이봉명 시인의 형형한 눈빛을 통과한 일상은 삶의 갈피에 끼워지지 않고 나름 생명력으로 발산된다. 시는 작은 것들의 숨소리를 맑게 펴 보이는 미학일까. 스스로 작아질수록 시의 품은 넓어지는 걸까. 텃밭두렁 아래로 휘어진 풀잎이며 나무울타리 위로 고개를 내민 오이순이며 고추잠자리의 투명한 날개, 여기에 돌배기의 눈물방울 같은 이슬이 맺혀 구슬구슬 빛난다.

 

애초에 사람은 자연의 곁가지라는 듯 인간의 사유가 갖는 작위성을 버리듯 이봉명의 시에는 지식의 오만함이 없다. 민중의 현재를 고민하고, 인류 공통의 문제인 경제적 불평등을 지적하다가도 결국 기득권 세력의 마름으로 전락한 지식의 깡마르고 창백한 자리를 박차고 나선 시의 보폭, 그의 시심(詩心)은 차라리 애잔하다.

 

흔하고 볼품없는 일상의 소소함을 언어의 키로 까불러서 잔돌과 티를 골라내고 입김으로 불어내며 시의 고유성을 확장하는 그의 시세계는 시원의 건강함을 빼다 박았다.

 

지천으로 피고 지는 꽃들과 논밭에 곡식들과 노동, 여기에 닿는 인간체취는 아직도 산골 마을이 살만 한 곳임을 힘껏 매김질하는 것 같다.

 

그는 여러 권의 시집을 상재했다. 발표 지면에 구애받음이 없이 창작된 그의 시편들은 『꿀벌에 대한 명상』, 『아주 오래된 내 마음속의 깨벌레』, 『지상의 빈 의자』, 『포내리 겨울』, 『지상을 날아가는 소리』, 『바람의 뿌리』 등의 시집에 수록되었다. 그의 시집 아무데나 열어봐도 자연과 노동이 어울린 삶의 정체가 오롯하게 형상화되어 있는 것이다. 사람이 별개 아니라 풀과 꽃과 곡식 등에 속하는 미약한 존재임을 시로 일깨워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시편들엔 미약하다는 말을 앞지르는 것이 있었다. 사람은 노동을 통해 뭔가를 느끼는 존재감이 그것이다. 그의 시는 노동을 통해서 넓어지고 깊어진 자연인의 사유를 언어의 형상으로 빚어내는 존재감을 빛내고 있는 것이다.

 

이봉명의 이번 시집에 수록된 시편들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풀잎에 맺힌 이슬 한 방울의 반짝임, 그것이 그의 시 무기이자 순정임을 보여준다.

 

누구도 어떻게 사는 것이 아름답게 사는 것인지를 명징하게 밝힐 수는 없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시편들을 통해 사람답게 살지 못하도록 끝끝내 간섭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간접 화법으로 나타낸다. 시에 형상화된 언어미학적 울림 그것에도 관심을 가져야겠지만 삶을 불편하게 하는 지점을 찾아내 형상화한 그의 시학을 바르게 읽어내는 것이 이 시집을 읽는 목적이겠다.

 

<시의 촉수로 건져낸 삶의 결>

 

나는 그의 시집 『바람의 뿌리』 발문에서 “누가 자신을 보든 안 보든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시의 보폭을 넓혀가는 그의 시간은 논밭일 하기 싫어서 꾀똥 누거나 지면을 얻기 위하여 소맷동냥하기에 바쁜 이들을 준엄하게 꾸짖는 것 같다. 어떤 출판사에서 시집을 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어떤 시를 쓰고 있느냐가 더 중요한 게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인 이가 이봉명 시인이었던 것이다.”라고 썼다.

 

나는 이 생각을 물릴 이유가 없다. 시인의 품성이 그렇고 시의 격이 여기에 어그러짐이 없으므로 나는 그의 새 시집에 대한 새롭고 다채로운 이해를 구할지언정 이 생각을 번복하거나 수정할 생각이 없다. 더구나 이번 시집에 수록될 시편들을 읽다가 나는 적잖이 놀랐다. 일상의 소소한 토막을 시의 촉수로 건져내어 삶이나 사회의 단면을 예리하게 짚어가는 시구가 구절구절 반짝였던 것을 기억한다. 그런데 여기에 자연스러움까지 묻어났던 것이다. 스스로 그러하다는 자연의 이치를 어느 결에 체득한 것일까. 농사꾼의 일상이 새롭게 바뀔 가망이 거의 없는 산동네에서 그의 시는 삶에 내재된 살아냄의 안팎을 물고 시간의 바깥을 눈겨냥하는 것은 아닐까.

 

안개 속에서 눈 뜬다

 

이슬방울 습한 아침

 

아가의 칭얼거림과도 같이

 

불 밝히듯 창문 활짝 열고

 

일상의 작은 소리 끌어 모아

 

그 사람 마지막 사랑인 듯

 

참으로 슬픈 날 몇 개의 구도를 잊지 않고

 

살다보면 다 못한 말이 얼마나 많았으므로

 

모든 꽃과 나무 빛나는 열매를 제치고

 

지상의 어느 풍경

 

죽어서 다시 돌아오지 못할 마을

 

그 간절한 기다림의 등쌀에, 겨우

 

꽃 피고 있는 것이었다

 

기어이, 꽃잎에 유서 한 장 써두었다

 

-「나팔꽃」, 전문.

 

겨우 피어 있는 꽃송이. 하지만 ‘겨우’ 라는 단어를 거슬러보면 “아가의 칭얼거림”이 있고 불 밝힘도 있다. 불과 14행이 전문인 소품에 삶이 아리게 박혀 있다. 살면서 할 말을 다 하고 사는 이는 드물다. 할 말을 못하고 사는 이가 태반이라고 적어야 옳을 터이다.

 

여기에 한 치도 비껴남이 없는 나팔꽃의 사정도 풍요로워 보이지 않는다. 마음 속에 뭐가 맺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죽어서 다시 돌아오지 못할 마을/ 그 간절한 기다림의 등쌀에” 겨우 꽃이 피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잠깐 눈앞을 스치듯 “기어이 꽃잎에 유서 한 장 써두었다”라는 시행은 누구의 임종을 지켜보는 것 같아서 위태롭기까지 하다. 이른 아침에 핀 나팔꽃 한 송이를 바라보는 시인의 눈가가 촉촉하다.

 

일상이 적힌 작은 부분들을 끌어 모아 평생을 일궜을 삶, 그렇게 겨우 핀 나팔꽃 한 송이가 자신의 유서임을 알아챈 이마가 문득 서늘하다. 자신에게서 떠나가는 게 더 많았을, 어쩌면 마지막으로 보고 있을 가난한 산동네 풍경을 짚어보면서 뭔가를 기다리는 나팔꽃은 우리네 삶의 안팎으로 읽힌다.

바람도 없는데

 

눈물도 없는데

 

사람도 없는데

 

덕유산 적상산 백운산

 

저희들끼리 손잡고 붉어지네

 

논과 밭 비탈진 언덕

 

끼리끼리 눈짓 손짓 발짓하더니

 

열매 단단히 영글어 가고

 

머리맡에 푸른 하늘 떠받치고

 

가장 늦은 저녁 무렵, 길모퉁이 쪽부터

 

불면의 깃발 흔들며 달려 나오는

 

어린 날의 아이들은 눈 반짝이고

 

집 밖에서 몇 겹 씨방

 

더운 날 땀방울의 무게 재지 않는다

 

바람도 없는데

 

눈물도 없는데

 

사람도 없는데

 

저희들끼리 영글어 가고

 

자꾸 붉어지네

 

-「그해 가을」, 전문

 

문명적 사회현실과 다르게 살아가는 자연물도 있다. 자본의 의붓자식으로 살면서도 그것이 사회에 어떤 의미인지조차 모르는 캄캄한 불감증도 얼마든지 있다. 돈의 위력에 종속된 삶의 획일성은 사람이 가진 자유의 폭을 얼마나 비좁게 하던가. 몇몇 부도덕한 이들이 자신의 잇속을 명문화하기 위해 내세운 문명과 자본의 질서가 사람을 소외의 그늘로 내몰고 있다. 여든 일곱 가구가 깃든 옛 동네에 돌아가 흰옷 입고 농사지으면서 이웃과 너나들이로 살았던 시절은 이제 꿈도 꿀 수 없는 지경이다.

 

누구를 탓하자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문명과 자본이 가진 야비한 속성을 질타하기는커녕 되레 거기에 복무하는 지식인들은 오늘도 반성문을 쓸 줄 모른다는 점을 말할 뿐이다.

 

적상산에 덕유산에 백운산에 가을이 왔다. 바람이 없을 리 없고 눈물이며 사람도 없을 리 없는데 시인은 아무도 없는 가을에 닿아 단풍을 본다. 적막하다. 시인은 오랜만에 혼자가 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회 현실에 구애받음 없이 “끼리끼리 눈짓 손짓 발짓”으로 단단히 영글어가는 열매들이 시인은 부럽기도 하고 서럽기도 하다. 자기들끼리 영글어가는 열매를 바라보면서 어린 날의 자신과 벗들을 떠올리자마자 시인은 부러움과 서러움이 한꺼번에 들이닥쳤을 것이다. 풍찬노숙이었을 도시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온 시인, 정확히 말하자면 세상을 스스로 버렸을 시인. 하지만 그도 세상의 변화를 감지할 수밖에 없다. 뭔가가 잘못된 세상임을 알고 이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잘못된 세상에 영향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임을 시인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삶의 희망이 ‘씨방’에 담긴 것일까. 씨방은 알차게 영글기 위해 여름 내내 속이 탔을 “땀방울의 무게”를 재지 않는다. 모든 게 수단으로 강요되는 시절, 한 개의 알곡을 얻기 위한 행위 자체가 목적이자 그것으로 족한 식물의 현실에 집중한다. 문명과 자본과 이기적 뻔뻔함을 장착한 현실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오늘을 살아내는 자연의 이치를 존중하겠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문명적 색채가 단 한 글자도 언급되지 않은, 자연 그 자체의 질서로 형상화된 시를 읽으면서 일반이의 삶이 갈수록 어렵다는- 그럴수록 자본가의 지갑이 두툼해질 것이라는 비정상적인 오늘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이런 세상이 부끄러워서 적상산, 덕유산, 백운산의 단풍이 더욱 붉어진 것은 아닐까.

 

동쪽에서 서쪽으로 벌써 해는 지고

 

서둘러 새도 아이도 손 털고

 

집으로 돌아갔다, 널어 말린 이불 걷고

 

새댁도 설거지까지 끝내는 꽃잎 떨어지는 순간

 

이제, 멀리 출타 중이었던 예순 다섯

 

혼자된 남자 여태 보이지 않는다

 

살아있는 동안 절뚝거리며 간신히 집으로 돌아와

 

몇 개의 전등 켜고 나면 어둔 그 길 돌아갈 날보다

 

이제 불 밝게 열어둔 내 집으로 훨훨

 

날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세상에서 절뚝거리며 걸어온 모든 날

 

다 잊어버리고 집으로 가는 그 무렵

 

세상에 불타는 것 쓰다듬고 있나니

 

잠들고 싶은 자, 떠나고 싶은 자

 

서둘지는 말아야지, 침묵하지 말아야지

 

이 무렵 어둔 세상 모든 길마다

 

등불 하나 켜 둬야지

 

-「저물 무렵」, 전문

 

저물 무렵이란 제목이 자신의 인생 역정을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번 그의 시편들은 유난히 세월의 흔적을 언표한 경우가 많다. 「꿀벌의 침」, 「가풀막」, 「유서1」, 「새벽길3」, 「비 오는 날」, 「폭염주의보」 등에는 시인의 나이가 적혀 있다. 언제부턴가 시인들은 자신의 나이를 밝히지 않는다. 시에 나이를 적는 경우가 드문 데다 시집 표지에 사진은 내보이면서도 생년월일을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생년월일을 까먹었냐고 당사자들을 붙잡고 일일이 캐물을 수도 없고, 시 또는 시집 표지에 나이가 적혀야만 시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굳이 이런 것을 따지는 것은 실례겠다. 그런데 이봉명 시인은 자신의 나이를 버젓이 적어놓고 있다. 언제 그를 만나면 나이를 밝힌 자랑스러운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봐야겠다.

 

날이 저물면 누구든 집을 떠올린다. 나이가 어떻든 자신이 무엇을 하고 지내든 저녁밥 짓는 냄새가 날 즈음이면 문득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이봉명 시인도 예외가 아니다. 한세상 살면서 “절뚝거리며 걸어온 모든 날”을 잊고 “불 밝게 열어둔” 집으로 훨훨 날아가고 싶다. 집 밖에서 집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부재를 확인하는 시인에게 또 다른 집이 보인다. 다시 말하면 저물 무렵 단순히 집에 가고 싶은 심경이 아닌 것이다. 시에는 끝내 언표하지 않았지만,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뭔가를 서둘지 않고 침묵하지 말겠다는 다짐이 예사롭지 않다. 유한한 목숨을 가진 자로서의 성찰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이 시는 「유서1」의 변주가 아닐까. 아니다. 시에 나이를 적은 작품들은 모두 언젠가는 돌아갈 집, 즉 죽음을 자신의 몸에 바짝 붙이고 시를 쓴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욕망에 해당되는 “세상에 불타는 것 쓰다듬”으며 “어둔 세상 모든 길마다/ 등불 하나 켜”고 싶다는 속내를 비친 게 아닐까.

 

죽음이나 사뭇 부담스러운 세월의 흔적이 이봉명의 새 시집 전체를 아우르지 않는다. 꽃과 비와 눈이 서정의 주된 관심으로 작동되기도 한다. 여기에 더해지는 유년의 기억은 순식간에 시인의 나이를 어린 시절로 되돌려놓는다. 모두가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의식이 어린 영혼을 닦달하기 전의 꼬맹이 시절과 또래들이 혼탁한 사회를 나무라듯 저 위에서 싱싱한 생명력을 뽐낸다.

 

 

고샅에 눈 쌓이듯

 

산 밑 동네 아이들

 

좁은 골방 비집고 들어가

 

굵은 싸리나무토막 반으로 쪼개어 윷놀이 한다

 

개, 개 나왔다고 개 패듯 쥐어박고

 

모, 모 나왔다고 목을 끌어안고 뒤집어지는 밤

 

장골배기 피도 안 마른 놈들

 

막걸리 마시거나

 

작은 집 닭 모가지 비틀어오기

 

무수히 하늘 흩고 내리는 눈

 

그 눈발사이로 훌쩍 어른이 되고 싶은 아이들

 

세상으로 뿔뿔이 갹출(醵出)되어

 

추렴하지 않아도 눈 내리면

 

너스레 없이 세상의 틈 사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도리기」, 전문.

 

시상에 활력이 넘친다. 어서 어른이 되고 싶은 꼬맹이들은 윷놀이와 닭서리에 신났다. 장골배기는 무주 지역에서 쓰이는 토박이말로 정수리를 뜻한다. 쉽게 말하자면 이마빡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들이 윷을 놀고 막걸리를 마시고 닭서리를 하는 것이다. 어른들의 눈이 두렵지 않을 리는 없다. 하지만 자기네 행동이 들키기 전에는 걸림새가 없다. 무수히 “하늘을 흩고 내리는” 눈을 맞으며 겨울 추렴을 즐긴다.

 

그 추운 겨울, 또래들과 신나게 아울리면서도 어서 어른이 되고 싶었던 그쯤이었을까. 아니면 가난을 벗어나고 싶은 의식이 어린 영혼을 구체적으로 닦달하던 때였을까. 눈을 맞으며, 어쩌면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그해 1, 2월쯤 고향을 떠나 세상에 갹출된 친구들. 모질다는 세상의 틈에 끼어들어 배고픈 시간을 달래듯 잔뼈가 굵었고 이젠 자신처럼 나이배기가 되어 있을 친구들. 시인은 눈 내리는 어느 겨울날에 또래들을 떠올렸을 터이다. 꼬맹이 시절로 돌아갈 수도 없고 그때 친구들을 불러낼 수도 없는 세월의 야박함이 그의 목젖을 축축하게 하지는 않았을까. 돈이 사람 노릇하는 부박한 현실을 거절하듯 이제라도 만나면 반가울 표정이며 목소리며 온갖 시늉이 한순간이나마 시인의 마음자리를 훈훈하게 데워주었을 터이다.

 

3. 눈을 기다리는 시의 내구력

 

이봉명 시인이 지난 봄에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왔다. 잘 있느냐, 뭐 별일은 없느냐 이런 수인사가 오가야 할 터이지만 시인은 내 목소리를 확인하더니 다짜고짜 “개 허지?”라고 말문을 떼었다. 나는 물론이라고 대답을 했다. 그는 전북 작가회의에 새 집행부가 꾸려졌다는데 그냥 말 수가 있느냐, 똥개 한 마리 잡을 터이니 집행부에 속한 사람들과 무주로 놀러오라는 것이었다. 입이 궁한 참에 이게 웬 떡이냐, 문명인들이 야만적 음식이라고 잡도리해대는 통에 점점 사라져가는 개고기를 수육으로 먹고 탕으로도 먹게 생겼으니. 나는 더 들을 것도 없이 날짜를 잡아달라고 보챘다.

 

무주에 들어서면서부터 차창으로 스쳐가는 동네들을 유심히 바라봤다. 아직도 인기척이 있는지 저 집은 어쩌자고 반쯤도 넘게 기울었는지 어떤 어르신이 유모차를 밀면서 마실 나가는지를 보고 싶었다. 이산 저산에서 밤꽃이 피고 있었고 시구룸한 밤꽃 냄새가 승용차 안에 스며들었다. 모내기 끝난 논에는 어린모들이 몸살을 하느라고 시무룩해 있었고 못물 잡아놓은 논배미에 푸른 산이 물그림자로 가라앉아 있었는데 이따금 물그림자 속에서 뻐꾹새소리가 뛰쳐나올 것 같았다. 4차 산업 또는 문명이라는 것에 소외되었을지라도 나는 이 산골 마을에 우리네 삶의 원형질이 간직되어 있고, 그것이 인류의 미래라는 것을 마음속에 새기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승용차는 빨랐다. 꿩이 지치게 목 빼는 한나절을 자꾸 차창 뒤로 보냈다. 일행은 개고기에 소주 한잔 곁들이는 시간을 끌어당기는지도 몰랐다.

 

승용차는 적상산이 보이는 누구네 집에 도착했다. 주인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우리를 집 뒤에 있는 비닐하우스 막으로 데려 갔다. 필시 개고기를 삶고 있을 무쇠 솥이 허연 김을 물고 있었다. 탁자에는 푸성귀며 쌈장이 차려져 있고 이선옥과 이해양 두 시인이 바쁘게 움직였다. 드디어 수육을 담은 접시가 우리 눈앞에 드러났다. 소주와 맥주를 찾는 눈길들이 흐뭇해지기 시작했다. 건배나 인사말 이런 것은 없었다. 봄날 하루를 맘 놓고 즐기는 것, 봄날 하루 문명이라는 몰염치를 발 아래로 두는 것, 문학이나 시국 따위 그런 골치 아픈 얘기 말고 봄날 하루를 너나들이로 즐기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었다.

 

음력 시월 스무날께

 

웃통 홀딱 벗고 사시나무처럼 떨면서

 

펑펑펑 눈 내리는 바람 기다리네

 

마칼바람이어도 좋겠네

 

서릿바람이면 더 좋겠네

 

왜바람이면 얼마나 더 좋을 것인가

 

눈은 이리저리 방향 없이 마구 날리면

 

봄꽃 바람에 흩날리듯 내리겠네

 

댑바람 분다고 탓하지 않겠네

 

언제나 눈은 바람을 타고

 

온정 잔잔히 흐르는 마을 찾아

 

손돌바람 부는 그 즈음

 

첫눈 내리면 참 좋겠네

 

눈 내리네

 

눈이 내리면

 

눈 내리네

 

-「손돌이바람」, 전문

 

이봉명의 시나 인간적 측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시가 「손돌이바람」이 아닐까. 음력 10월 20일께 매우 맵게 분다는 바람이 손돌이바람인데 그는 이 바람에조차 정답게 다가서는 사람이다. 맵디맵다는 손돌이바람이 마칼바람으로 서릿바람으로 왜바람으로 변형되어 시상을 민첩하게 끌어가지만 사실 시인은 눈을 기다리고 있다. 객지를 떠돌았던 때를 빼고 그는 겨울마다 지겹도록 눈을 만났을 터인데도 눈을 기다리는 것이다. 뭔가를 탓하고 구박하지 않는 그의 시심에 기대어 맵디매운 손돌이바람도 잠재울 어떤 것을 기다리는지도 모를 일이다.

 

겨울 초입에 혹독하게 들어설 손돌이바람조차 끌어안는 천진무구한 태도가 지난 봄날에 전북 작가회의 집행부를 불러냈을 터이다. 그는 문우들에게 철 따라서 바뀌는 산골짝의 하루를 전했을 것이다. 이 천진무구함에 사람과 일상에 대한 배려와 이해심이 깊이 내장되어 있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시를 손끝으로 썼다기보다는 몸으로 먼저 쓰고 나서 붓을 들었을 그의 시편들, 삶이 가진 비극성까지 끌어안는 시편들은 승속을 따지고 가리지 않는 무욕의 시학으로 자리를 넓혀가는 중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해맑다. 하지만 샘물을 퍼 올리듯 생생한 시의 두레박질은 여기에서 그치지는 않는다. 땅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를 삶의 터 닦음으로 알고 오랜 시간 시의 내력을 단단히 다지며 살아온 시인이기 때문이다. 계절에 따라 농사를 짓고 꿀벌을 치는 일은 농부로서 당연히 해내야 할 일이다. 씨앗이 곡식으로 알차게 영글기까지 속상하는 일도 당연히 견뎌야 할 일이다. 그러나 삶의 비린 토막들을 호미질 괭이질로 쳐내고 걸러내어 시로 육화해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손돌이바람을 타고 쏟아질 첫눈을 기다린다. 내가 살고 있는 전주에도 그가 원하는 함박눈의 기미가 미치길 기대한다. 형형한 그의 눈빛을 실망시키지 않고 하늘을 흩어버리며 눈이 펑펑펑 쏟아지는 날 그는 적상산에 전화를 걸 것이다. 오늘 하루 노곤하게 잘 살았다고, 내일이 또 오늘이 되고 어제가 되겠지만 그딴 거 잊은 지 오래라고 축축이 젖은 목소리를 바람에 말릴 것이다. 그렇게 그는 날로 천진무구하게 젊어질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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