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 산촌작가 이봉명 시집, 『검은 문고리에 빛나는 시간』 ..9회째 발간적상산의 품에서 시의 숨결로 걸러낸 언어미학
[오늘뉴스=이영노
[오늘뉴스=이영노 기자] 무주 적정산 자락 ‘문명에 훼손당하지 않은 詩의 영토’라는 산촌 시집이 차가운 아침을 연다는 소식이다.
이른아침 소식은 무주 산골에서 꿀벌을 하고 농사를 지으며 시를 쓰는 이봉명 시인이 아홉 번째 시집 『검은 문고리에 빛나는 시간』을 도서출판 작가에서 출간하였다.
시인은 1956년 전북 무주에서 태어나 1991년 『詩와意識』으로 등단하였으며, 무주작가회의, 전북작가회의, 한국작가회의, 한국장애인문인협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시집으로 『꿀벌에 대한 명상』 『아주 오래된 내 마음속의 깨벌레』 『포내리 겨울』 『지상의 빈 의자』 『지상을 날아가는 소리』 『바람의 뿌리』 『가풀막』 『자작나무 숲에서』, 산문집 『겨울엽서』 가 있다.
이번에 펴내는 이봉명 시인의 아홉 번째 시집은 4부로 구성되어 총 60편의 시를 수록했다.
농경문화 속에서 끄집어낸 시의 질감이 예전의 시편들과 확연히 다르다. 자연과 사람의 만남을 시의 눈금으로 걸러낸 그의 시편들을 통해 이봉명 시세계의 숭고한 갱신을 엿볼 수 있다. 이는 무주 적상산의 품에서 문명에 훼손되지 않은 시의 숨결로 오래 걸러낸 이봉명 시인의 곰삭은 언어미학의 경지라 할 수 있다.
안도현 시인은 “그의 시는 겨울에도 얼음 밑으로 숨죽여 흐르는 계곡 물소리 같다.
그 어떤 폭설이 내려도 멈추지 않는 그 지속성이야말로 우리가 주목하고 경외해야 할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다. 시인이 쓰고자 하는 대상을 얼마나 골똘히 바라보았는지, 그 대상에게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썼는지를 읽고 나면 이 시집이 그저 “조곤조곤 어제를 풀어 놓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적상산 아래 포내리에 1930년대 백석이 다시 찾아왔나 싶을 정도다.
세상을 말로 파악하는 백석의 태도를 이으면서 시인만의 경험을 보편화하는 기법은 가히 절정에 다다른듯하다. “눈먼 정이 눈 뜬 사람 잡는” 이야기를 “까마귀 열두 소리에 고운 소리 하나 없다 꺽꺽하고 장끼 날아갈 때 아로롱 까투리 따라가”는 이 좋은 말씀을 이봉명 시인이 아니면 누구에게서 들으랴“고 평한다.
이분법적 사유를 벗어던진 이봉명의 서늘한 시
장마라지만 비가 와도 좋고 안 와도 좋았다 심심하면 불러올리던 물귀신을 돌다리 밑으로 밀어 넣고 도깨비 여울 건너듯 시내에 붉덕물이 흘렀다 매캐한 연기에 콜록거리다 여든셋 황 노인 깊은 잠 들었다 솥뚜껑에 전 부치는 소리로 비는 내리고 그새 유두콩 싹이 한 치나 자랐다 ─ 「그 사이」 전문
시의 시간적 배경은 장마이다. 그런데 장마가 빚어내는 눅눅한 분위기가 시에 생략되었다. 비가 오든 말든 상관없다는 태도다. 빗줄기 때문에 딱히 할 일이 없다는 듯 사람의 영역에 물귀신과 도깨비를 호출하여 적상산 골짝에서 쏟아지는 ‘붉덕물’을 즐기기까지 한다. 물귀신이란 액귀를 완벽하게 손아귀에 틀어쥔 사람들의 여유, “도깨비 여울 건너듯”에서 보이듯 작은 양의 붉덕물(붉은 토사가 섞인 물)을 도깨비에 빗댄 언사는 적상산의 품에 사는 사람들의 낙관적 기질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황 노인이 “깊은 잠 들었다”라는 진술은 한 개인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황 노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장례를 준비하고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을 위해 솥뚜껑에 전 부치는 냄새가 난다. 그리고 전 부칠 때 나는 소리로 비가 내리고 인간사와 관계없이 “유두콩 싹이 한 치나 자랐다”로 시를 맺는다. 장마 속 삶의 형세를 담담하게 접근한 이봉명의 이 시엔 옳고 그름, 흑과 백, 선과 악, 있다와 없다 등등의 이분법적 사유에 닿지 않는다. 장마, 붉덕물, 죽음, 유두콩 등이 어울려서 사람살이를 보여줄 뿐 유두콩의 싹은 옳은 것이고 붉덕물과 죽음은 그른 것이라는 등식에서 벗어나 있다. 스스로 그러하다는 자연自然의 이치를 시인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장대비가 쏟아져 붉덕물이 흐르는 것도 노인의 죽음도 유두콩 새싹이 난 것도 “그냥 그런 것”으로 여길 뿐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망정 화산이 폭발하여 농토를 일시에 덮쳐버리거나 허리케인이 들이닥쳐 사람의 목숨 수백 명을 빼앗아버리는 사건을 선악으로 나누지 않고 자연의 작용 중 한 개로 여기는 것처럼 적상산 근처의 자연에도 이분법적 판가름은 없다. 인간사가 자연사의 한 부분임을 자연스럽게 드러낼 뿐이다. 이분법적 사유를 벗어던진 이봉명의 시는 서늘하다.
적상산을 펑펑펑 덮는 눈 순식간에 적상산을 가둬버린 눈 우리가 오가던 길목마다 토끼며 장끼 발자국이 어지러울 것이었다 삼촌들은 펑펑펑 쏟아지는 눈발을 등 뒤에 두고
(중략)
함박눈이 이틀째 펑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싸이나 먹은 토끼며 장끼를 토막 치는지 벌써 매운탕 끓여 얼큰해졌는지 삼촌들은 우리를 찾지 않았다 동전 한 닢 없는 호주머니를 맥없이 뒤집어 보기도 하고 구멍 난 양말에 엄지발가락이 튀어나와도 우리는 부끄럽지 않았다 ─ 「눈 내리는 날」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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