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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인천 최고 100선, 인천의 성냥공장
성냥 제조업의 시발점이자 여성노동운동의 현장
 
오늘뉴스 기사입력  2017/06/14 [12:24]
▲ 성냥공장 여성 근로자     © 오늘뉴스


[오늘뉴스=노명복 기자] 1900년 러시아 대장성이 발행한 「조선에 관한 기록」이란 보고서에는 1886년 제물포에 외국인들에 의해 성냥공장이 세워졌는데, 일본제 성냥이 범람하면서 생산이 중단되었다는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이 자료를 통해 한국 최초의 성냥공장이 인천에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성냥의 국내 전래는 1880년 개화승(開化僧) 이동인(李東仁)이 일본에 갔다가 수신사 김홍집(金弘集)과 동행 귀국할 때 처음으로 성냥을 가지고 들어왔다고 알려져 있다.

 

일반에게 생활용품으로 대중화하기는 1910년대 일본인들이 인천에 조선성냥(朝鮮燐寸)을 설립한 것을 비롯, 군산․수원․영등포․마산․부산에 공장을 설립하여 생산 판매함으로써 가정용으로 확대․보급된 시기를 기점으로 하고 있다.

 

인천 최초의 성냥 공장은 1917년 10월 금곡리에 설립된 조선인촌주식회사였다. 이 공장이 인천에 들어선 것은 경인 지역의 넓은 시장과 무엇보다도 압록강 일대 삼림지에서 생산되는 목재 원료를 배편으로 쉽게 들여올 수 있는 이점 때문이었다. 이 회사는 신의주에 부속 제재소까지 두었고 직원도 남자 200명, 여자 300명 등 총 500여명으로 패동(佩童), 우록표(羽鹿票), 쌍원표(雙猿票) 등의 성냥을 연간 7만 상자를 생산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성냥갑 제조를 위해 하청을 주는 곳이 500여 호에 달할 정도로 규모나 생산량이 대단했다. 그 무렵엔 기계화가 잘 이뤄지지 않아 성냥개비에 인을 묻히거나 성냥개비를 성냥갑에 넣는 일을 전부 수작업으로 했다.

 

성냥공장에선 주로 10대 소녀들이 일했으며 성냥공장 외에 금곡동과 송림동 지역의 5백여 가구가 성냥갑을 만들어 공장에 납품하는 일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인천지역 최고의 가내수공업으로 자리매김했다.

 

당시 금곡동 일대 공터나 도로변엔 햇볕에 말리기 위해 널어놓은 성냥개비와 성냥갑으로 온통 뒤덮이는 등 동네 전체가 성냥공장을 방불케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21년 3월 조선인촌주식회사의 직공 150명이 지배인 배척을 선언하고 동맹파업에 들어간 이래, 인천지역 각 성냥공장에서는 파업이 잇따랐고, 임금인상과 8시간 노동제 요구 등 동맹 파업이 계속되기도 하였다.

 

인천의 성냥공장은 성냥제조업의 시발점이자 본거지라는 연대기적 의의 말고도 일제시대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쟁의 현장이었다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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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6/14 [12:24]  최종편집: ⓒ 오늘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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