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상산 아래 포내리에서 작가 이봉명...책 발간

무주작가회의, 전북작가회의, 한국작가회의,한국장애인문인협회에서 활동

이영노 | 기사입력 2022/11/09 [17:48]

적상산 아래 포내리에서 작가 이봉명...책 발간

무주작가회의, 전북작가회의, 한국작가회의,한국장애인문인협회에서 활동

이영노 | 입력 : 2022/11/09 [17:48]

 

[오늘뉴스=이영노 기자] 어려운 역경속에서 시집 책자를 펴낸 무주군 산촌마을 이봉명 작가를 소개한다.

022년 11월 15일 발간한 이 작가는 '적상산 아래 포내리에서'로 문학계에 입문한 그는 1956년 전북 무주출생으로 지난  1991년<詩와意識>으로 등단한 작가이다.

 
 활동은 무주작가회의, 전북작가회의, 한국작가회의,한국장애인문인협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도서출판 두엄으로 저서는  시문집 <아직도 사랑은 가장 눈부신 것> 시집<꿀벌에 대한 명상><아주 오래된 내 마음속의 깨벌레><포내리 겨울><지상의 빈 의자><지상을 날아가는 소리> <바람의 뿌리><가풀막> 등 있다

 
   시집은 주최.주관 :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후원 :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적상산 그늘에 적힌 존재론적 원형질의 시학 이병초(시인, 웅지세무대 교수)

들어가며


  이봉명의 시편들은 나뭇잎과 풀잎, 시냇물 소리와 바람 등에 삶의 실재를 대응시켜 놓음으로써 시에 오늘을 들인다. 시적 대상의 인간적 형상화라는 언어 미학을 성취한 셈이다. 또한 기억 속의 풍경을 재현해내는 언어의 결은 주변부의 쓸쓸한 풍정을 호출하는 데 인색하지 않다. 시에 언표된 자연과 일상은 따뜻하다. 느리게 어제가 되어 가는 슬레이트 지붕과 돌담과 거기에 넌출진 호박잎이며 멀리 떠나간 사람들까지.


  하지만 그의 시편들은 독자에게 먼저 손을 내밀지 않는다. 농경문화의 삶이 가졌던 오랜 풍정을 추체험케 할 뿐이다. 현대성이란 말에 개의치 않는 그의 시편들은 시의 중심부에서 삶의 외연으로까지 번지는 존재론의 샘물을 길어 올릴지언정 두메산골 또는 산촌(山村)이라는 외피를 두르지 않았다. 갈수록 동네가 텅텅 비어가도록 삶을 간섭하는 누구를 탓함이 없고 시간의 무상함을 외면하지도 않는다.


  이봉명 시인은 『꿀벌에 대한 명상』 이후 『가풀막』에 이르기까지 일곱 권의 시집을 상재했다. 시독법이며 창작법은 물론 시어가 뿜어내는 빛깔의 회로까지 몸에 적혔을 시인. 그래서일까. 그의 시편들엔 문명적 징후에 눌린 강박이나 지루한 산문적 진술은 없다. 이미지에 포획된 언어의 날렵한 섬광, 시상 비약의 경쾌한 상상력과 과감한 생략을 통한 시상의 돌연한 울림이 시편들 곳곳에서 반짝인다. 적상산의 토박이 정서에 활착된 시편들, 삶에 내재한 불가피성까지 끌어안는 그의 시 세계는 해맑음을 놓치지 않았다.

 

삶의 행위에 접목된 언어의 무늬

 
  나는 『가풀막』 발문에서 “시를 손으로 썼다기보다는 몸으로 먼저 쓰고 나서 붓을 들었을 그의 시편들, 삶이 가진 비극성까지 끌어안는 시편들은 승속을 따지고 가리지 않는 무욕의 시학으로 자리를 넓혀가는 중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해맑다”라고 썼다.


  그런데 이번에도 이봉명 시인은 시집의 발문을 부탁했다. 안 된다고, 저번에도 쓰지 않았냐고 둘러대도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냐고 허허로운 웃음소리만 전화기에 들렸다. 그의 허허로운 웃음소리에 적힌 말줄임표, 이를 어쩌면 좋으냐. 중앙 문단에 굳이 눈길을 돌리지 않는 이봉명 시의 치열성이며 곡진함을 나는 감당할 수 있는 것이냐. 이미 작품들을 시집 형태로 묶어놓고 연락해 왔을 이봉명 시인.


  나는 발문을 쓰기로 했다. 여간해서는 부탁을 안 하고 사는 사람의 시집이기에 그의 말줄임표를 끌어당겨 새 시집에 수록될 80여 편의 시들을 자세히 읽어보았다. 나는 놀랐다. 시의 행간에 삶의 어둑살이 자주 언표되었으나 시상은 변함없이 해맑던 것이다. 시에 발화된 욕망과 사람의 현재가 요구하는 욕망이 길항일 수밖에 없는 시의 운명을 오래전에 터득했을 시인. 스스로 풀꽃이 되고 시냇물 소리가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어쩌자고 시간이 맑디맑게 충일해졌을까 하는 느낌에 더 놀랐다. 여기에 일흔 고개라는 세월의 존재감이라니.  떨어진 꽃 이파리들이 바닥에 몸 깔고 울던 날 있다

 
 5월은 모과나무꽃 피고

 
 사과나무꽃 피었다

 
 그믐쯤 감꽃 피었다

 

 탱자나무 가시 틈으로 하얀 꽃 피고

 
  감자밭에 자주색 꽃 피고


  야단스럽게 밤꽃 피는 6월

 
  뜬금없이 고구마꽃 피었다


  꽃이 피고 지는 날에 한동안


  시끌벅적대던 포내리

 
  모과가 아이 머리만 하게


  사과가 큰아들 주먹보다 더 크게

 
  감자밭에 자주감자 고구마밭에 자주 고구마


  감나무에 감이

 
  밤나무에 알밤이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이따금 비와 바람 햇살이

 
  끝까지 땀방울의 무게를 재고


  거기서 일흔 고개 넘는다
                                  -「가을, 포내리」, 전문.

 
  사람들은 고향을 떠났어도 ‘포내리’엔 어김없이 가을이 왔다. 봄날의 “꽃 이파리”며 5월과 6월의 눈부신 꽃 잔치를 지나서 가을 앞에 다다른 화자. 계절이 주는 풍요로움에 흠뻑 빠져든 시상에 나이 일흔이 맺힌다. 시의 어디에도 일상의 구겨짐은 없다. 서정시의 전형이 이렇다는 듯 한국의 자연 또는 인간화된 결과물들만 보인다. “뜬금없이 고구마꽃 피었다”는 구절을 제외하면 색다른 질감으로 와 닿는 시어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이 시를 여러 번 읽었다. 계절의 변화를 다독인 듯한 이 시를 다시 읽게 하는 시적 장치는 무엇일까. 사계절에 곁들여진 “비와 바람 햇살이/ 끝까지 땀방울의 무게를 재고/ 거기서 일흔 고개를 넘는다”라는 진술일까.

 
  감꽃을 주워 먹던 시절로부터 오늘까지 화자 또한 순정하게 자연의 순리를 따랐을 터이다. 그는, 한때 시끌벅적했을 ‘포내리’ 생태의 내력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을 ‘꽃 이파리’였고 탱자꽃이었으며 알밤임과 동시에 비바람을 견딘 자연인이었을 것이다. 씨를 뿌리고 밑거름하고 논에 피를 뽑고 곡식들을 거둬들이면서 희망은 책에 적힌 문명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견디어 온 불행한 역사에서 온다는 것을 확신했을 터이다.

 
  그런 화자가, 숫자로 획일화된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그가 가을 풍정 앞에서 새삼스럽게 나이를 짚어본다. 무릎이 깨지는 코흘리개를 지나 윗니 드러내고 환하게 웃던 시절만 있었으랴. 손금을 비껴간 일들도 눈앞을 스쳐 갔으리라. 어깨가 처지는 날만 있었으랴. 북풍한설보다도 더 혹독한 인간사에 맵게 내몰렸던 때도 있었으리라. 삶에 불가피하게 끼어드는 우여곡절을 내면화하면서 세상과의 불화를 절절이 체득했을 자연인.

 
  살아 움직이는 박물관이라고 해도 무방한 그의 가슴에 일흔이 어떤 무늬로 적혔는지는 궁금하다. 그 무늬며 색감이 궁금해서 나는 이 시를 여러 번 읽었을 것이다. “산다는 게 이런 거 아니야?”라는 빤한 무채색의 무늬가 적히지는 않았을 게 분명하다. 일흔 고개에 맞물려지는 무게감은 세간의 저울이 감당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얀 박꽃 피는 밤은 무섭다

 
  저녁 숟갈 놓고 잠든 초가지붕

 
  이리 오라 하얀 손 흔드는 꽃

 
  손톱달 뜨는 밤이면 더 무섭다

 
  이내 쓰러질 칫간 위로

 
  슬금슬금 하얀 손 내미는 꽃

 
  대굴대굴 골목길 굴러오는 달걀귀신


  보름달 뜨는 밤이면

 
  도깨비 쏟아져 나오는 둥근 박


  박꽃 피는 밤이면 무섭다

 
  축축하게 젖은 바지 추겨 입고


  이른 아침 소금 꾸러 간다

 
                            -「박꽃」, 전문.

 

 
  철들었다는 말은 어른이 다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농경문화와 밀착된 이 말은 때를 알아서 씨를 뿌리고 가꾸고 거두는 계절의 이치를 깨쳤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철들어버리면 사는 게 재미가 없다. 무엇 하나 바뀔 게 없는 1차 산업의 지루한 반복이 삶의 회로이기 때문이다. 직업을 바꾸지 않는 한 누구도 농사꾼의 회로를 벗어날 수는 없다. 세상은 빠르게 변한다. 몇 개월 만에 건물이 우뚝 들어서고 산을 뚫어 고속도로를 내는 세상이다. 그런데 전북 무주군의 포내리, 화자의 고향은 그대로다. 대도시라는 말에 맞물린 자본과 문명에 소외되었다는 느낌을 떨쳐낼 수 없다.

 
  그런 밤이었을까. 얼마든지 무시당해주고 소외당해주마고 독하게 마음먹었던 밤이 아니었을까. 철들기 전의 어린 화자에게 밤은 무섭다. 어찌 보면 밤보다도 ‘박꽃’이 더 무섭다. 밤이라는 시간 배경에 핀 초가지붕 위의 박꽃, 어린 화자에게 이리 오라고 손을 흔드는 박꽃. 초가지붕 위에서 시원의 시절로 회귀하여 밤만 되면 동네에 ‘대굴대굴’ 굴러왔을 달걀귀신 얘기와 도깨비 얘기에 가위눌려 어린 화자는 이부자리에 오줌을 재리고 만다.

 
  농경문화 속에서 꼬마가 오줌을 싼 아침이면 한국의 아침 풍경은 비슷하다. 꼬마에게 키를 씌우고 이웃집에 소금 얻으러 가도록 하며 소금을 얻으러 온 꼬마는 여지없이 이웃집 할머니께 부지깽이로 얻어맞는다. 쪽박에 소금 한 줌 얻은 꼬마의 눈가에는 매번 눈물꼬리가 매달려 있다. 이런 일이 다반사였을 어린 화자, 오줌싸개가 되어 부지깽이로 매 맞는 수모보다도 달걀귀신과 도깨비보다도 ‘박꽃’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어린 화자는 “박꽃 피는 밤이 무섭다”라고 고백하기에 이른다.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 어린 화자는 오줌싸개에서 벗어났을 것이다. 달걀귀신이나 도깨비에게서도, 박꽃의 환유에 엉기는 공포도 물리쳤을 것이다. 그 오줌싸개 꼬마가 요즘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대도시에서 떵떵거리기는커녕 농사짓는 일에 매여 살고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시에 중요한 것은 꼬마의 현재에 있지 않고 어린 화자를 통해 옛 기억을 떠올려 주면서 현대인은 무엇을 놓치고 사는가를 묻는 데 있다.


  달걀귀신과 도깨비의 설화에 오줌 재리고 살던 시절에는 사람이 목적이었다. 이 세상에서 사람같이 귀한 존재는 없었다. 먹고사는 것에 곤궁했고 옷치레가 허술했어도 사람을 함부로 무시하지 않았고 작은 음식이라도 이웃과 나눠 먹을 줄 알았다. 동네에 초상이 나거나 경사가 나면 공동체나 두레라는 말도 필요 없이 사람들이 모여들어 안암팎으로 일을 추렸다. 길가로 뻗은 오이순을 밭으로 되돌려 놓았고 두렁콩을 함부로 밟지 않았으며 자신의 몸을 다치게 하면서까지 해야 할 일은 없는 거라고 어른들은 가르쳐주시곤 했다. 하여 이 시절을 기억하고 더러 간직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사람보다 더 귀한 존재는 이 세상에 없다고 믿으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을 터이다.


  지금도 그런가. 오줌싸개 꼬마를 통해 추적해본 존재론적 원형질의 삶을 소중히 간직하고들 사는가. 대도시에서 자본과 문명의 혜택을 받고 사는 사람들도 이 세상에 사람보다 더 귀한 존재는 없다고 믿는가. 사람을 목적으로 알고 살아가기는커녕 달걀귀신이나 도깨비 설화에 깃든 인간적 체취조차 잊어먹고 돈을 신앙처럼 모시고 살지는 않던가.
 

  가재 물 짐작하듯 비가 내린다

 
  아침부터 간도 쓸개도 다 빼 줄 듯 비 내린다

 
  값싼 갈치자반 올려 아침상 밀어 놓으면


  같은 떡도 맏며느리 주는 떡이 더 크다고

 
  개구리 낯짝에 물 붓듯 비는 내린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어느 시러베 아들놈 어깃장 놓듯
  거미 새끼 풍기듯 비는 내리고


  안인심이 좋아야 바깥양반 출입이 넓다며


  또 자꾸 씹어대며 도롱이 쓰고 주막에 간다

 
                                         -「가을비•9」, 전문.
  가을비가 내린다. 가을비란 모름지기 이렇게 내린다는 듯 “가재 물 짐작하듯” 조금씩 소슬소슬 비가 내린다. 햐, 가재가 물기를 짐작하듯 비가 내리다니. 여러 번 생각해 보아도 보통의 관찰력으로는 닿기 힘든 형상화이다. 이 문장이 시인의 창작 결과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전해진 말일 가능성도 있겠다. 하지만 “가재 물 짐작하듯 비가 내린다”라는 시적 정황은 한국 서정시의 새로운 장을 활짝 열어젖힌 것 같다.
  가을비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빗방울이 빗줄기로 변해 “간도 쓸개도 다 빼 줄 듯” 제법 굵게 쏟아진다. 이 문장도 시인의 창작 결과물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일상에서 간과 쓸개라는 단어를 부정적으로 흔하게 쓰이기 때문이다. 빗줄기는 급기야 “개구리 낯짝에 물 붓듯” 맏며느리에게 큰 떡을 주는 것처럼 푸지게 쏟아진다. 그리고 독자의 시선을 단번에 비끄러매는 통쾌한 문장이 발현된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어느 시러베 아들놈 어깃장 놓듯/ 거미 새끼 풍기듯” 가을비가 내리기 때문이다.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거미 새끼들이 가을비의 서슬에 무더기로 모여 있다가 뿔뿔이 흩어졌다는 것은 굵어진 빗줄기가 어느 정도 잦아들었음을 뜻한다. 그런데 “어느 시러베 아들놈 어깃장 놓듯”이란 욕에 가까운 막말 문장에 시의 활기가 팽창된다.
  과도한 비유를 쓰지 않는 이봉명의 시편들에 ‘-듯’이라는 직유가 다섯 번이나 쓰였고 간과 쓸개, 개구리 낯짝, 개똥밭에 굴러도, 어깃장 놓듯 등등의 단어와 입말에 적힌 해학적 마주침이 유별나기 때문에 시의 활기가 도는 것은 아니다. “어느 시러베 아들놈 어깃장 놓듯”이란 예로부터 전해진 입말을 시에 앉힘으로써 시상은 돌연 활기를 띠기 때문이다. 욕이 섞인 이 막말 문장은 입말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속담을 땅바닥에 패대기쳐버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과연 살 만한 것이냐, 부박한 거래 풍토에 얼마든지 편승하는- 개똥보다도 못한 종자들이 판치는 이승이 정말 저승보다 나은 것이냐를 묻는 풍자적 요소라니. 누구든 학교에 가야 하고 누구든 돈을 벌어야 하는, 그렇게 누군가가 짜놓은 시간표에 길들여졌던 날들이 결국 사람의 가격표로 귀결된 오늘을 “시러베 아들놈”을 앞세워서 통렬하게 질타하는 시상이라니.


  불과 10행의 단행시에 “값싼 갈치자반 올려 아침상 밀어 놓으면”과 “또 자꾸 씹어대며 도롱이 쓰고 주막에 간다”를 빼면, 나머지 문장에 우리의 속담이나 입말이 도렷하게 자리를 지킨다. 시원으로부터 전해진 우리 말본새가 이처럼 마침맞게 딱 들어앉은 시적 상황을 나는 요즘 만난 적이 없다. 전북 무주의 적상산 밑에서 시퍼렇게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시의 바깥에서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것 같다.


  낮은 개울가에서


  높은 산꼭대기까지


  산 중턱에서 나무의 얼굴을 본다
  사는 일 너무 중한 줄 알고

 
  잎은 대궁의 좌우 열 개씩 전형적인 겹잎

 
  가장자리에 날카로운 톱니 있다


  가지 끝에서 여러 개의 꽃대 올라와


  수많은 하얀꽃 핀 자리마다


  굵은 콩알만 한 동그란 빨간 열매 익으면


  세상이 이토록 눈부시다


  갈잎나무로 껍질은 갈라지지 않아 매끄럽다
  흰머리 검게 할 줄 알아


  오래오래 바라보았더니


  너도 검은 머리가 부럽더냐고 물어서


  숲에는 마가목이 많아
  잠깐 사이에도
  오래 푸르다고 말해 주었다
  그냥 웃었다

 
                     -「마가목」, 전문.

 
  이번 시집에 나타난 시편들의 요긴한 행위는 식물에 접근된 관심이다. 시인은 적상산 근처에 지천으로 널린 식물을 호출하는데 「마가목」도 그중 한 편이다. 한 개의 자연물을 응시하는 시인의 시선은 찬찬하다. 꽃이 피는 시절로부터 붉은 열매가 맺는 가을까지 한달음에 이어지는 시상은 식물의 겉모습에서 시작된다. 마가목은 잎이 겹잎이며 “가장자리에 날카로운 톱니”를 가지고 있는데 “가지 끝에서 여러 개의 꽃대”가 올라와 수많은 꽃을 하얗게 피운다. 그런데 새잎이 돋을 때 자연의 이치에 따라서 잎이 돋는 게 아니고 “사는 일 너무 중한 줄 알고” 새잎이 돋는다.


  시에 적힌 계절은 봄이다. 화자의 눈앞에서 마가목은 여전히 새잎을 내미는 중이다. 하얀 꽃에 “콩알만 한 동그란 빨간 열매 익으면”이란 전제는 화자의 꿈을 해석한 진술이다. 더구나 하얗게 핀 꽃에 빨갛게 익은 열매가 겹칠 수는 없다. 봄과 가을은 개별적인 생명력을 가지기 때문에 만날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화자는 봄과 가을이 겹치는 눈부신 현상을 산에 와서 만난다. 이것이 시의 상상력이다. 주체와 대상 간의 접촉에서 촉발되는 시의 발화점에서부터 인간적 삶의 체취를 입히는 이미지의 펼침이 예사롭지 않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세상은 과연 있는 것이냐. 자연물로부터 획득된 화자의 상상 세계는 어디까지가 진실이냐. 어째서 눈부신 세상은 적상산 근처의 자연에서만 발현되는 것이냐. 이런 인간의 지식이 끼어들 필요가 없다는 듯이 시상은 화자의 꿈에 접목된 눈부신 데에 꽂혀 있다. 마가목 핑계를 대고 산에 올라가서 만난 자연은 정말로 눈부셨을까. 이산 저산에서 뻐꾹새가 울고 장끼가 길게 목을 늘이뺐을 공간의 어디쯤에서 마가목은 집단으로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었을 터이다. 봄햇살을 맞받아치며 반짝이는 새잎들이며 갈잎나무 껍질도 자연의 음향에 몸과 마음을 섞고 있었을 것이다.

 
  마가목에 기댄 자연이 눈부시게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목소리 때문이 아닐까. 백발이 성성한 화자에게 마가목이 “너도 검은 머리가 부럽더냐고 물”으니 화자는 “오래 푸르다”라고 선문답처럼 전하는 목소리 뒤에, ‘웃었다’라는 시상 마무리가 유독 정답다. 자연물과 화자가 대화를 나누거나 자연의 현상에 인간사를 빗댄 진술은 이것만이 아니다. “내가 사는 마을과 네가 돌아보지 않고 떠난/ 밤길 더듬어 도주한 밭길에 민들레꽃”(「민들레꽃」)이 피고, “배고파 울던 시집간 큰누나 같”(「꽃며느리밥풀꽃」)이 꽃은 핀다. 세상 일에 더러 짓밟혀 서러워도 “너처럼 쉽게 상처받지 않”(「질경이」)기 위해서 깨알같이 작은 질경이꽃은 핀다. 누구나 익히 아는 「패랭이꽃」이며 「홀아비꽃대」며 「배롱꽃」, 「호박꽃」, 「제비꽃」, 「찔레꽃」 등등도 사람이 존재하듯 꽃을 피운다.


  자연물도 사람처럼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다. 하지만 시적 진술로는 가능하다고 나는 믿는다. 시가 특별한 고도의 언어 미학이 아니라 자연현상과 인간사를 재해석하는 언어의 무늬이기 때문이다. 이런 언어 미학을 일찌감치 꿰뚫어 이봉명의 시이기 때문에 「마가목」과 밀회를 즐기듯 대화할 수 있었으리라. 몸에 세월이 누적되어 백발이 성성해도 마음은 아직도 청춘이라는 듯, 이제 늙을 일만 남았다는 듯 허허롭게 웃음을 보이는 화자의 입가에 봄햇살이 살갑게 반짝였으리라.

 

3. 나가며

 

  현대성에 대한 반성도 없이 도시적 삶의 질서로 빠르게 재편돼버린 오늘은 만만치 않다. 모두가 사는 오늘은 도시와 농촌, 자연과 문명이라는 경계를 묵살하기 일쑤다. 시의 현실은 오죽하랴. 요즘의 시에 언표되는 자연은 현존하는 관계항이 아니다. 시에 나타난 자연은 공존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자본의 질서를 거절하는 시적 장치일 뿐이다. 그러나 이봉명의 시편들에는 이런 불편한 진실이 말끔하게 제거되어 있다.

 

  가끔 포내리를 떠나 멀리

 
  바다에 가고 싶을 때 있다

 
  조그맣게 입술 벌려 바다라고 부르면
  눈치 없이 무릎 위로 올라와

 
  사십오 년 만에 만난 옛 여인처럼

 
  손과 입술과 목과 가슴을 어루만지며

 
  내가 품고 싶었던 세상의 한쪽을 다 가진 듯

 
  산 좋고 물 좋고 공기 좋은 포내리 밀어내고

 
  이 일을 어쩌면 좋으냐

 
                                -「바다에 가고 싶다」, 부분.

 

 
  이봉명 시인은 젊은 날 객지를 떠돈 적 빼고는 거의 적상산의 그늘에서 살고 있다. 그런 그가 ‘바다’에 가고 싶다. 바다라는 단어를 입술로 달싹여보기만 해도 시인은 마음이 설레고 옛 여인을 품에 안은 듯 숨이 가빴으리라. 사십오 년 만에 만난 옛 여인의 “손과 입술과 목과 가슴을 어루만지며” 시인은 고향 ‘포내리’에서 벗어나고 싶다. 어떤 죄를 달게 받더라도 포내리에 얽힌 삶의 불가피성들을 깡그리 외면하고 싶다.


  오직 한 여인을 품은 사나이의 정열은 시간이 가도 식지 않을 것 같다. 이런 뜨거운 집착이 시인 이봉명을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이봉명은 「자작나무숲에서」라는 연작시를 쓸 수 있었고 물푸레나무며 비자나무, 감나무와 바람, 보리 이삭에 이르기까지 자연물에 존재의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인간사를 자연물에 빗댔든 자연물을 인간사에 빗대든 그 행위에서 촉발된 존재론적 원형질의 발화가 이봉명 시인의 머리맡을 맑게 씻어주었던 게 아닐까. 그렇게 시의 외연을 확장해 가는 것일까.


  자본주의는 재산 증식이 목적이기 때문에 나눔과 베풂이 불가능하다는 말에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단 1초도 손해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혹시 ‘나’는 아닌가를 의심하기도 한다. 어쩌자고 ‘나’가 이렇게 돼버렸는지 안쓰러울 때가 있다. 이럴 때 나는 이봉명의 시편을 떠올리곤 했다. 자본과 문명이 주는 편리함에 길들여지는 순간 자유가 박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적상산의 사계절 이봉명 시인. 시에 언표된 자연이 공존이든 자본의 질서를 거절하는 시적 장치이든 그 문제는 시인의 몫일 터.

 
  갈수록 백발이 성성해질 시인께 맑은 술 한잔을 청한다.

 
표4 글

추천사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 골이 깊으면 물이 풍부하다. 거기에 온갖 나무와 풀과 꽃이 자란다. 이름도 다 기억할 수 없는 새와 산짐승과 벌레와 1급수에서만 서식하는 열목어와 금강모치가 산다. 숱한 짐승 중에 사람만이 냄새를 풍기고 자연을 더럽히고 있는데 그중 이봉명은 덜 오염시키는 종족에 속한다. 티를 안 내어 좋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쉽게 삐지고 시야가 좁아지고 고집 센 노인으로 변하기 마련인데 그이는 세상을 보는 눈이 넓고도 풍성하다. 뻥 치지 않는다. 조곤조곤 진실만을 이야기한다. 작고 보잘 것 없는 여린 유산들을 눈물겹게 바라본다. 희끗희끗 머리카락에 눈발 날리는 사내는 그것을 보듬고 순결한 시로 꽃을 피우는 것이다.

 
 사람과 산은 겪어 보아야 비로소 보인다. 적상산 아래 포내리에 사는 이봉명의 모든 작품은 가난한 살림에 대한 착한 보고서이다. 작은 마을에 단풍 들고 눈이 내린다.

                                                 유용주(시인)
序文

 

 
이제 혼자서 담을 등지고

 
땅에 발을 내딛는 게 버겁다

 

 
대책없이 첫눈을 기다리고


두꺼운 솜이불 홑청을 뚱하게 쳐다보며

 
서답 끈을 잡아 땡기는 중이다

 
밤낮도 잊은 채 몸을 키웠다거나

 
둥실하게 둥대미 들고 나오는 아버지가

 
갑자기 보고 싶다거나

 
나를 업고 낯선 마을 고샅을 재촉하여 가는

 

 
허리굽은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동안

 

 
내게서


뭔 일 있는 건 아시든가

               2022년 10월  일


                 적상산 아래 포내리에서 작가는


무주작가회의, 전북작가회의, 한국작가회의,한국장애인문인협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시문집 <아직도 사랑은 가장 눈부신 것> 시집<꿀벌에 대한 명상>

 

 
<아주 오래된 내 마음속의 깨벌레><포내리 겨울><지상의 빈 의자><지상을 날아가는 소리>

 

 
<바람의 뿌리><가풀막> 등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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